아바이 마을의 맛, 향기, 햇살, 그리고 바다
TRAVEL
Essay
속초 아바이
마을의 맛
강원도 속초 아바이마을은 한국전쟁 이후 함경도 실향민들이 모여 살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이곳의 음식은 함경도식 전통 음식을 기반으로 하며, 특유의 담백하고 깔끔한 맛이 특징이다.
글, 사진 익스플로듀서 👦🏼
7PM 청초호 Epilogue
설악대교를 건너 터미널로 향하는 길, 청초호는 해질녘 노을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언제쯤 다시 와볼수 있을까?’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한동안 멍하니 서서 감상에 빠졌다. 가끔씩 지나가는 작은 배는 조용한 물살을 일으키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일상의 소란과 걱정들은 멀리 사라져버리고 청초호만이 내 앞에 펼쳐진 세상처럼 느껴졌다. 아름다운 노을이 내 눈앞에서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보며, 다음에 다시 이곳을 방문할 때는 누군가와 함께 와서 이 아름다움을 공유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11AM 부둣가 생선구이 거리 🍣
금강대교 위에서 바라본 부둣가 주변의 모습은 소박하지만 활기가 넘쳤다. 고기잡이 배들이 정박한 곳 주변으로 해산물 식당이 즐비하고 있고, 때마침 점심시간이라 생선 굽는 냄새가 다리 위로 풍겨왔다. 그 냄새를 맡자니 배고파 죽을 지경에 저기 보이는 아무 식당에 들어가서 자리에 앉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나는 다리 위에서 사진 찍기를 그만두고 이미 식당으로 먼저 달아난 내 위장을 추격하여 부둣가로 통하는 길을 발견하고 곧장 그리로 향했다.
쓰레기 더미가 쌓여있는 낡고 초라한 길을 지나 사람들이 웅성대는 식당가의 초입에 다다르자 배 위에서 앉아 묵묵히 그물을 풀고 있는 인부들이 보였다. 관광객인지 이곳 주민인지 구분이 안 되는 사람들이 한데 섞여 식당가 주변을 어슬렁 거리고 있었고, 식당 안의 조명은 어두워서 내부에 사람이 몇 명 있는지 어떤 모양새를 하고 있는지 알수가 없었다.
세련되게 잘 정돈되어 깨끗해 보이는 서울의 식당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라 선뜻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두 번째 식당은 사람들은 들라닥 거리는데 문은 닫혀 있었고 간판 하나 없어서 무엇을 파는 식당인지 구분이 안되어 마찬가지 그냥 지나쳐 버리고 인부들이 작업을 하는 정박된 배들로 다가가서 사진 찍기에 열을 올렸다.
인부 1) “(💢) 사진 찍지 말아요!”
그때 배 위에서 일을 하던 한 아주머니가 고개를 치켜들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나는 순간 놀랐지만 차분한 목소리로 받아쳤다.
👦🏼 “그쪽 안 나오게 찍어요.” / 인부 1)”그럼 왜 이쪽을 찍어요.. 저쪽으로 가서 하면 되지.”
오늘만 과민 반응을 보이는 것인지, 아니면 평소에도 외지인들의 사진 찍는 모습에 불쾌감을 느끼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멋진 촬영 스팟을 포기하는 것은 너무나 아쉬웠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몇 자 안 되는 거리를 빠져나왔다.
1PM 중앙광장 황소식당 🍜
광장 건너편에 위치한 시장 골목으로 발길을 돌렸다. 식당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아 벽에 붙은 메뉴판의 이미지를 왼쪽 오른쪽 전두엽에 팝업 시켜 놓고 1vs1 각축전을 벌였다. 라면에 들어가는 해산물은 거부감이 없어서 홍합 라면을 먹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막국수는 지금이 아니면 앞으로 먹어볼 기회가 없을 거 같아서 막국수로 주문하기로 결정하고, 주문하기에 앞서 가게 주인의 의중을 떠보았다.
“여기서 뭐가 제일 맛있어요?” 그러자 그녀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뭐라고 말을 꺼내기 어려웠을까. 대답을 망설이자 나는 “막국수 주세요.” 라는 말로 그녀의 대답을 지워버렸다. 그녀가 망설이던 이유는, 아마도 나 같은 손님에 대한 경험이 없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고민했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시장통이라 한가하게 그런 질문을 던지면서까지 음식을 먹으러 오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같이 한가해 보이는 옷차림과 헤어스타일과 말투를 보고 이곳저곳 궁금한 듯 살펴보는 나를, 어떤 사연을 가지고 이곳 근처를 배회하다 들어온 손님인지를 단숨에 간파했는지 몰라도, 주방에서 음식을 요리하던 주방장이 나를 보며 단번에 묻는다.
👨🏻🍳 “관광 오셨어요?” / 👦🏼 “네~”
그러자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할아버지도 지그시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기 시작하더니 내가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치자 서툰 미소를 지어 보이며 화답하는 듯했다.
팔순 이상으로 보이는 호리호리한 외모에 깔끔한 정장의 옷차림새를 하고 있었으나 가련해 보였던 할아버지는 내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 신기한 듯 유심히 관찰했다. 그는 잠시 후 반찬을 가지런히 테이블에 놓고 가던 여주인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할아버지 손님) “나는.. 뜨거운 건 자신이 없는데…”
그가 그렇게 소심하게 말한 연유는 잠시 후 팔팔 끓는 된장찌개가 그의 테이블 위에 올려진 뒤에야 알 수 있었다.
할아버지 손님) “나는 이렇게 주면 못 먹어… 그릇 하나 줘~”
할아버지의 요청대로 앞접시가 놓이자 왠지 모르게 내 마음도 편해졌다. 그가 첫술을 뜨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와중에 내 테이블 위에 막국수가 올려졌다. 일단 사진부터 몇 장 찍어 갈긴 다음 음식의 재료들을 관찰했다. 김가루와 무생채, 통 썰린 오이, 얼음 육수와 국수 면발과 매콤 달콤해 보이는 비빔장 위에 잘 익은 반숙과 깨소금이 올려져 고소한 냄새가 났으며 전체적으로 가지런하고 예쁘게 배열되어 있었다. 먼저 나무젓가락으로 뭉쳐있는 양념을 잘 풀어헤치고 면발들을 들었다가 놨다가 이리저리 몇 번 휘젓은 다음 국물부터 들이켜 보았다. 청량하고 시원한 시큼한 육수와 매콤하고 고소한 양념이 한데 어우러진 국물 맛은 여태껏 내가 먹어본 막국수 중 단언코 최고였다.
천천히 맛을 음미하며 블로그의 글이나 유튜브 영상을 보는 것이 음식 앞에선 사치처럼 느껴졌으며 그렇게 여유를 두고 먹을 수 있는 음식도 아니었다. 재빠르게 건더기를 해치운 다음 국물을 한두 모금씩 들이마시며 다음 행선지인 속초등대로 향할 생각이 앞서 있었을 때였다. 식당 주방장이 뭔가를 알려 주고 싶었는지 다가와서 말을 건넨다.
2PM 커피 향 짙은 해변 골목 ☕️
마을 어귀에서 바라본 상권의 모습은 토속적인 건축 양식에 이국적인 문화가 더해져 복고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더욱이 드라마 가을동화와 예능 프로그램 1박 2일 촬영지였음을 알 수 있게 하는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있어서 서정적이고 친근감 있게 다가왔다.
가게 중심으로 난 골목으로 조금 걸어 들어가자 80~90년대에 한창 유행하던 슈퍼마켓이 눈에 띄었다. 어렸을 때 점빵이라 불리던 곳, 그곳에 눌러앉아 밥 대신 매콤한 과자와 달콤함 아이스크림으로 끼니를 때우던 유년기 시절의 추억을 회상했다.
그 무렵 커피 볶는 진한 향이 파도처럼 한차례 밀려 들어와 입맛을 자극했다. 어른이 되는 순간이었다. 냄새가 나는 쪽으로 몸을 돌려 나아가자 해안가가 펼쳐졌고 그 중심에는 아바이 마을을 알리는 동상이 바다를 등지고 서있었다.
🎩 쓸쓸하고 외로운 잿빛 신사
푸른 바다를 등진 채로 선 그의 모습은, 새로운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푸른 바다와 따스한 햇살에 대한 그 예전의 갈망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마치 한때 바다에 무언가를 기대했었으나, 그 기대가 무너져버린 것처럼, 그의 얼굴은 더 이상 바다와 햇살을 보고 싶어 하지 않은 것 마냥 질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3PM 카페 오아시스 ☕️
붉은 파라솔이 인상적이고 강렬해 보이는 카페에 이끌려 들어가 자리 잡고 앉아 달콤한 고구마 라떼를 훌쩍거리며 바다를 바라보았다. 머지않은 곳에 방파제와 등대가 있어서 그런지 많은 유람선들과 고기잡이 배들이 몇 분 간격으로 들라닥 거렸다. 나는 이곳에서 그동안 밀린 글감과 오늘 있었던 일들을 맥북에 정리하며 두 시간 정도를 보낸 뒤 다시 해변으로 걸어 나갔다.
5PM 아바이 순대국밥🍲
저녁을 먹기에는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배가 고팠다. 해변가에 주류를 이루는 음식은 해산물과 아바이 순대 국밥 두 종류였다. 해산물보다는 육류를 선호하나 그렇다고 돼지 국밥을 먹을바엔 해산물이 낫겠다 싶었다. 하지만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먹어보겠는가! 하는 그런 심리 더하기 ‘이제, 지금쯤(이 정도 나이를 먹었으면..)이면 내 입맛에 맞겠지?’ 하는 그런 심리가 원플러스 원 세트 마냥 발동했다. 나도 모르게 수차례 거부하던 지난날 내 입맛의 흑역사를 잊었던 걸까.
아주머니) “혼자 여행 오신 거예요?”
👦🏼 “네.”
아주머니) “쓸쓸하겠어요.”
아주머니의 시각에선 그렇게 보였을지 모른다. 바닷가에 혼자 오는 나같은 솔로는 극히 드물 테니까.
👦🏼 “잠깐 왔다가 스쳐 가는 건데요 뭘.”
잠시 후 순대국밥이 한상 차려졌다. 팔팔 끓는 사발 국물의 수증기를 타고 돼지 속내의 비릿비릿한 냄새가 올라오자마자 백사장의 파도소리와 함께 후회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내가 왜 이 음식을 시켰을까. 국물 위에 뭉쳐있는 양념과 후춧가루를 숟가락으로 잘 저은 다음 국물 깊숙이 가라앉은 건더기를 들어봤다. ‘메뉴는 순대국밥이지만 돼지국밥이나 다를바 없지 않은가.’ 순대는 3개 정도만 들어있고 나머지는 돼지 껍대기와 비계 덩어리가 전부였다. 그나마 먹을만한 건 달콤 새콤한 명태식해 반찬과 깻잎, 파래무침, 깍두기, 김치뿐.
’20년 후에 다시 한번 도전해보자! 나는 국밥충 체질이 아닌가봐,’
6PM 아바이 마을을 떠나며…
아바이마을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설악대교로 오르는 육교 계단을 오르며 이곳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소박한 지붕들이 늘어선 마을 뒤로 동해바다가 펼쳐졌다.
이곳에서 보낸 시간 동안 나는 아바이 마을 사람들의 단순함과 풍요로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화려한 것보다는 소박한 삶에 무게를 두고, 바쁜 일상 속에서도 여유를 즐기는 법을 알고 있는듯 했다. 나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이곳에서의 소중한 경험을 가슴에 담았다.
그리고 다가올 여름의 끝을 준비하며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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